세계증시

'80년 동맹이 갈등으로' 미국-사우디, 유가 방정식 다시 쓴다

thirbyyy 2022. 10. 31. 13:13
'안보-석유' 관계 흔들....OPEC+ 감산, 균열 '쐐기'
공급자 우위 체재 굳히기...서구 선택지 딱히 없어
OPEC+ 유가 하한 90달러 목표. 고유가 유지 관측

 

지난 약 80년 동안 세계 석유시장 안정의 요체로 불렸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전략적 동맹 관계가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렸다. 에너지와 안보의 교환을 골자로 하는 양국의 동맹 구도가 지난 20년에 걸쳐 알력을 보인 가운데 올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균열이 뚜렷해졌다. 

 

최근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인플레이션 고통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우디가 원유 감산 결정을 강행하고 이에 미국이 관계 재검토 방침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양국의 균열에 쐐기가 박힌 모양새다. 미국과 사우디를 중심으로 작동해온 석유시장의 방정식이 다시 쓰일 판이다. 


 

'안보 - 석유' 관계 균열

미국과 사우디 관계의 시작은 1945년에 시작됐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얄타 회담을 마치고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사우디 초대 국왕을 만나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인수하고 사우디는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한 게 시작이다. 미국은 1980년 페르시아만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 행사도 불사한다는 '카터 독트린'도 체결한다. 

 

이후 혈맹이라고 할 정도로 밀착했던 양국 관계는 최근 20년 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1년 9·11테러 납치범 상당수를 사우디가 지원했다는 미국의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미국에서 '셰일 혁명'이 일어나 산유량이 급증하면서 중동에 대한 석유 의존도가 떨어지자 외풍이 불었다. 석유와 안보의 교환이라는 이해관계의 한 축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 안보의 이해관계가 뒤틀렸다. 2011년 중동에서 확산한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을 미국이 지지하고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붕괴를 용인하자 사우디가 격분했다. 나아가 미국이 사우디 숙적인 이란과 2015년 핵문제와 관련한 국제적 합의를 체결해 불신감이 고조됐다. 또 2018년 터키에서 일어난 반사우디 체제 언론인 사망의 배후로 사우디 정부가 지목되면서 미국 정치인 사이에서는 반사우디 정서거 퍼졌다.


균열 촉진 '러시아'

양국 관계가 더욱이 급랭한 것은 2년 전 친사우디 행보를 밟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물러나고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다. 대선 운동 당시 사우디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사우디를 '왕따국'으로 만들겠다고 한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라크 내 미군의 위상을 격하하는 한편 걸프만 군사시설을 철수하고 예멘 전쟁에 쓰이는 대사우디 미사일 수출을 보류했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파기한 이란 핵협정의 복원을 추진하고 언론인 살인 사건 막후의 조종자로 거론된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의 소통을 거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파트너를 실권자 빈 살만 왕세자가 아닌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으로 바꿨다. 사우디 강경파에서 미국의 안보 약속을 둘러싼 회의론이 제기되고 대미 무기 의존도 검토의 목소리가 고조됐다. 

 

균열의 촉진제는 올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관련 사태로 배럴당 90달러대에 있던 유가가 120달러선을 기록하는 등 기름값이 폭등하자 석유 소비국인 서구와 생산국인 사우디 등 중동의 입장이 갈렸다. 중동 산유국은 늘어난 재정 수입 덕에 모처럼 단비를 맞았지만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은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19 사태발 공급망 경색 현상으로 골치를 겪는 와중에 유가 폭등까지 겹친 인플레로 신음했다. 

 

올해 11월 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마음이 조급해진 바이든 대통령은 7월 사우디를 찾아가 빈 살만 왕세자에게 증산을 요청했다. 하지만 10월 5일 사우디가 주도하는 산유국 협의체인 OPEC+는 바이든 대통령의 증산 요청을 무시하고 하루 200만배럴 감산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10월 11일 사우디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때라며 관계 재설정 방침을 밝힌 직접적인 이유다. 

※ OPEC+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으로 구성된 협의체로 2016년 창설됐다. 사우디가 이끄는 OPEC 회원 13개국(세계에서 확인된 석유 매장량 약 80% 차지)과 러시아 등 비회원 10개국(9.7%)으로 구성됐다.


공급자 주도 체제 굳히기

OPEC+의 감산 결정은 산유국 관점에서 수요 둔화에 의한 유가 하락을 방어하고 석유 수입을 키우려는 생각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미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내려진 이같은 결정은 전문가 사이에서 정치적·지정학적 함축적 의미가 큰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동안 석유 결제 수단으로 달러가 통용됨으로써 미국의 금융·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게 한 석유와 안보 교환 관계의 약화를 상직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여서다. 

 

OPEC+의 감산 강행이 갖는 세계 패권에 대한 복잡한 의미는 제쳐주더라도 석유시장의 이권만큼은 자신들이 가져가려는 의도가 확실하다. 종전에는 서구가 생산 정책에 압력을 행사해왔고 산유국이 이를 수용하는 형태였지만 앞으로는 이를 배제한 공급자 중심의 체재를 완전히 굳히겠다는 뜻이다. OPEC+ 가맹국 러시아가 서방의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런 요인과는 상관없이 이익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것임을 확실히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산유국 입장에서 석규 가격을 높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은 지상 과제이기 떄문이다. 기후변화에 의한 화석연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친환경 에너지 전환 움직임으로 수십년 내 석유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는 관측이 잇따르는 가운데 미래에 대비할 재원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미 중동 산유국의 보유 석유와 매장 자원은 크게 평가절하된 실정이다. 

 

중동 산유국이 고유가로 큰 이득을 보고 있다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사우디의 올해 상반기 석유 판매액은 전년비 74% 증가했지만 10년 만에 드디어 재정흑자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증산 압박은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석유에서의 탈피를 위해 청정에너지 보급을 추진하는 한편 유가 인하를 종용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를 둘러싸고 지나친 편의주의라는 비판이 산유국 사이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 선택지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딱히 꺼내 들만한 선택지가 없다.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약 1200만배럴로 2위 사우디의 1100만배럴을 앞서는 세계 1위이지만 소비량이 2000만배럴로 훨씬 많고 대응 여력도 부족하다. 고유가 임에도 불구하고 설비투자가 미진한 까닭이다. 과거 부채를 일으켜 저렴한 석유를 대량으로 생산한 셰일 호황의 파국이 트라우마처럼 업계에 박혀있는 데다 유정관 등 개발에 필요한 자재값이 올라 기동적인 생산 확대가 억제되고 있다. 

 

유정관 가격은 평균 톤당 약 3800만달러로 1년 새 1.8배가 됐고 셰일 오일 생산 시 수압파쇄에 사용되는 모래 가격도 전년비 2배가 넘어가는 등 기업이 받는 채산성 압박이 커졌다. 게다가 연방 공유지에서 신규 굴착 입찰을 불허하는 바이든 정부의 정책으로 최상위급 시추 면적이 고갈된 상황에 직면한 업계는 움짝달싹 못 하는 실정이다. OPEC+가 대담하게 감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이런 미국의 사정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


NOPEC으로 팔꺾기?

미국 정치권에서는 OPEC대항법 제정의 여론이 들끟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전략비축유 방출을 통해 수급 긴축에 대응하고 있지만 여력에 한계가 있는 만틈 징벌적 장치를 마련해 강제로라도 증산을 유도하자는 취지다. 관련 법안으로 의회에서 심의 중인 것은 'NOPEC(석유생산, 수출가르텔금지)'이다. 

 

사우디 등 중동의 산유국은 독점금지법 적용을 받는 미국 기업과 달리 주권 면책특권에 따라 관련 법을 적용받지 않는다. 하지만 NOPEC 법안은 OPEC을 반독점적 위반으로 소추할 권한을 사법부에 부여한다. 이렇게 되면 바이든 행정부는 OPEC을 세계 석유시장 조작 혐의로 미국 내 기소가 가능하고 담합 혐의가 인정되면 우리나라 돈으로 조 단위에 해당하는 수십억달러 벌금이 부과된다. 

 

OPEC 대항법안 과거 20년 동안 유가가 급등할 때마다 미국 정치권에 등장한 주제이자 항상 관련 주제가 화두가 될 때마다 바이든 대통령이 중심에 섰던 사안이다. 유가가 급등한 2000년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바이든은 빌클린턴 대통령에게 OPEC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2007년에는 NOPEC 법안의 공동 발의자로 나섰다. 모두 법룔로 실현된 적은 없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OPEC의 영향력 억제를 위해 의회와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는 등 대항법 제정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였으나 이번 역시 NOPEC의 실현 가능성은 낮은 선택지로 평가된다. 중동 산유국의 결제 통화 다변화를 가속화하는 역효과를 낼뿐 아니라 산유국의 미국 금융자산 투매를 불러올 수 있어서다. 무기 매각을 아예 동결할 수도 있으나 이는 러시아의 밀월을 부추길 뿐이다. 어쨌든 미국에 있는 ㅅ너택지라고 해봐야 편익보다 비용이 큰 게 전부다. 


산유국에 기우는 승기

석유시장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의 승기는 당장 산유국에 기운 듯하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제재받는 러시아가 웃고 있다. 현재 서구는 러시아의 원유 수출분에 대해 가격 상한제를 적용해 러시아의 전비 조달력을 약화시킬 계획이지만 산유국의 감산 결정으로 '무위론'이 나오고 있다. 공급 부족으로 석유가 귀한 상황이 되면 뭐든 구매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판매량이 줄어도 가격이 뛰면 수입 증대 효과가 생기는 까닭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러시아산 가격 상한제 방법으로 해상 보험 활용을 구상 중이다.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량이 해상으로 운송되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예로 여러 선주가 가입한 국제조직인 IGP&I(총 세계 석유 수송선 보험의 95%를 제공)를 활용해 러시아산 원유 상한제에 구매처가 동의하지 않으면 보험 적용에 제한을 두는 방식 등이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수출되는 원유의 출처를 추적하기 어렵다는 게 상한제 설정의 어려움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달 발표된 OPEC+의 감산폭 하루 200만배럴은 2020년 4월 코로나19 사태 당시의 1000만배럴과 비교해 작다. 나아가 오랜 투자 부족에 따른 생산 여력 부족으로 이미 감산 상태에 있는 산유국을 고려하면 실제 감산폭은 100만배럴에 불과할 것이라며 산유국 감산 결정의 영량력을 축소해 보는 시각도 있다. 

 

※ OPEC+의 감산은 각 가맹국의 생산 목표치에서 감산폭을 할당해 진행한다. 예로 A국에는 감산량을 기존 목표치 대비 20만배럴, B국에는 목표치 대비 10만배럴을 각각 할당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OPEC+ 가맹국 23개국 중 과반인 15개국이 기존 목표치 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실상 산유국의 감산이 이미 진행 중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11월 감산분은 8개국에만 할당됐다. 사우디는 목표치 대비 52만 6000배럴, UAE는 16만배럴 등이다. 


유가는 어떻게 되나

여러모로 미국과 유럽 등 서구의 대항 카드는 제한적이다. 경기 침체로 수요를 위축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세계 원유 수요가 이미 지난 8월 코로나19 사태 전의 99%에 달한 가운데 올해 겨울은 난방 수요기를 맞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라면 석유시장의 구도는 공급자 우위 체재로 흘러가 한동안 고유가 국면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OPEC+가 감산을 통해 목표하는 유가 하한을 90달러로 본다.

 

골드만삭스는 이달 앞서 내년 1분기 WTI와 북해산 브렌트유 선물시세 전망치를 각각 모두 10달러 상향해 110달러와 115달러로 제시했다. 또 브렌트유의 내년 전체 전망치는 108달러에서 110달러로 올렸다. 현재 WTI와 브렌트유 가격은 각각 91달러, 85달러대다. 골드만삭스는 내년 브렌트유 전체 전망치에 대해 "OPEC+가 내년까지 감산을 유지하면 현재 전망치보다 25달러 더 뛸 여력이 있다"고 했다.

 

50년 전 OPEC을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73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에서 벌어진 윰키푸르 전쟁이다. 사우디와 UAE 등 OPEC이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국에 석유 공급을 중단한 세계 최초의 오일쇼크로 이어진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OPEC+는 10월 5일 올해 욤 키푸르에서 만나 감산 결정을 강행했다. 이번 사우디와 동맹 산유국의 결단이 원유시장의 주도권을 재편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한편 일각에서는 산유국의 감산 결정이 서구의 친환경 에너지 전환 속도를 끌어올려 오히려 자충수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OPEC 스스로 종말을 앞당긴 꼴", "석유시장 패권을 수복하려는 결저잉 오히려 에너지 전환을 재촉했다", "석유에서 탈피하고 싶어하는 주체는 정부,기업,소비자 등 누구나". "만들어지는 관에 스스로 못을 박는 격"